소년은 록커를 꿈꿨다. 하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노래할 수 없었다. 얌전히 공대에 들어가 화학을 전공하고 석유화학 기업에 입사해 연구원으로 일했다. 직장인 밴드로 조금씩 갈증을 해소하다 기회를 잡았다. 2017년 JTBC 팬텀싱어 시즌2에서 남녀 음역대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첫 무대부터 시선 강탈에 성공해 ‘포레스텔라’ 팀으로 우승까지 차지한 강형호(33) 얘기다.
팬텀싱어가 배출한 여러 크로스오버 4중창팀 중에서도 포레스텔라는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지만, 그는 아직도 목마르다. 카운터테너같은 천상의 미성과 야성적인 록스피릿을 한몸에 지닌 그에게 4중창 무대는 어딘지 비좁다. 10일 록커의 꿈을 꽉꽉 채운 첫 솔로 앨범 ‘ID:PITTA’를 내놓는 이유다.
“포레스텔라 활동을 하면서 가장 걱정이 카운터테너로 알려지는 것이었어요. 이걸 전공한 적도 없고 어쩌다 하게 됐는데, 나의 본질, 아이덴티티를 명확하게 하고 다시 출발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죠. 2년 정도 음악 공부와 아이덴티티에 대한 고민도 하면서 만들었는데, 어느 정도 색깔이 나온 것 같아요.”
포레스텔라의 이미지가 있으니 팬들 취향을 고려한 감미로운 록발라드 계열이 아닐까 싶었는데, 음원을 미리 들어보니 꽤 마니아틱한 음악이다. 스스로도 “오묘하고 몽환적인 음악을 추구한다. 브릿팝처럼 심오한 메시지가 담긴 아티스틱한 방향으로 가고 싶다”고 했다.
힐링을 원하는 크로스오버 팬층을 아우를 수 있을까. “모험이죠. 원래 더 가고 싶었는데, 그래서 모든 색깔을 다 꺼내지는 못했어요. 방향성은 잡았으나 아직 갈 길이 멀다고나 할까요. 지금은 마니아틱과 대중성의 경계선에 와있는데, 제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음악은 좀 더 가 있거든요. 개인 활동까지 포레스텔라 스타일로 한다면 의미가 없잖아요. 차별점이 분명히 있어야죠. 마니아틱한 장르를 조용히 혼자 소비하는 분들도 많은데, 그런 분들에게도 인정받고 싶어요.”
옆구리가 든든한 4중창 팀을 떠나 홀로 무대에 서는 첫 단독콘서트(12, 13일 블루스퀘어)를 앞두고 불안할 법도 하다. 그런데 “이제 보여줄 때가 왔다”며 들뜬 모습이다. “어릴 때 늘 무대를 뛰어다니는 꿈을 꿨어요. 잠들기 전에 외국 헤비메탈 음악을 들으면서 그런 상상을 하곤 했죠. 그런데 음악을 포기하면서, 가수가 돼도 그런 무대는 힘들겠다 싶었어요. 음악 소비문화가 다르니까. 한국에서는 많은 아티스트가 도전했지만 잘 안됐고, 결국 가요에 가까운 밴드 음악을 하게 되더군요. 진작에 꿈을 접었었는데, 어릴 때 상상했던 게 잠시나마 콘서트에서 펼쳐지게 된 거죠.”
음악을 포기했던 건 “어머니한테 계속 속아서”였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음악 선생님들이 전공을 권유했지만, 어머니의 생각은 좀 달랐다. “예고를 가겠다니까 성악 시킬 돈이 없으니 고등학교 가서 밴드를 하라시더군요. 고등학교를 가니 수능 잘 봐야 되니까 대학 가서 밴드를 하라고 하시고, 대학을 가니 군대부터 다녀와서 취업 준비를 하라는 거예요. 그때 처음 반기를 들었죠. 1년 동안 휴학을 하고 밴드를 했어요. 휴학하는 대신 군대 다녀와서는 밴드 관두고 취업 준비를 하기로 했는데, 도저히 안 되겠더군요. 장학금을 받는 조건으로 허락을 받았죠. 시험 기간 전부터 공부하랴 밴드하랴, 정말 바빴습니다.”
공대 밴드부를 시작으로 하나둘 모인 멤버들과의 인연은 직장인 밴드로 이어졌다. 개인 활동명으로 쓰고 있는 ‘피타(PITTA)’라는 이름도 직장인 밴드 이름 그대로다. “팔색조라는 뜻이에요. 장르 가리지 않고 재밌는 음악을 하자면서 붙인 이름인데, 그 친구들과 앞으로 틈틈이 공연할 인프라를 만들려고 그대로 차용한 거죠. 사실 이번 앨범도 밴드 기타리스트 용우라는 친구가 프로듀싱을 맡아서 2인조 밴드로 낸 것이에요. 그 친구가 있어서 안정적으로 개인 활동까지 병행하게 됐습니다.”
팬텀싱어에 나와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의 대표 넘버로 단숨에 주목받을 수 있었던 것도 밴드 활동 덕이다. 회식비를 벌기 위해 나간 각종 대회에서 ‘상 받기 좋은 곡’으로 선곡해 “3년 동안 한 곡만 팠다”는 것이다. “그걸 부르면서 내 소리가 이 정도까지 나는구나, 상품성이 있겠다 깨달았죠. 그런데 어머니가 팬텀싱어 시즌1을 보면서 ‘저 사람들 봐라. 저렇게 잘하는데, 네가 노래했으면 큰일났겠다’는 거예요. 근데 저는 해볼 만하다 싶었어요. 그래서 영상 하나만 남기자는 목표로 도전했는데, 자꾸 올라가니까 집에서는 헛바람 들까 봐 불안해하셨죠. 어머니는 트리오 올라갈 때까지 탈락을 위해 기도하시다가, 4중창까지 가니까 그제서야 우승을 위해 기도하시더군요.(웃음) 사실 활동 2년 차까지는 불안해하셨어요. 엄청 보수적인 집안이라 장남의 역할을 강조하시거든요. 장남은 안정적인 수입이 보장된 평범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해서, 저도 그런 삶을 추구했었죠.”
하지만 지금의 자리에 있는 건 따지고 보면 어머니 덕이다. “전공을 못하게 한 것도 다 어머니의 빅 픽처”였을지도 모른단다. “비전공자 타이틀이 아니라면 팬텀싱어에서 그만큼 지지받고 우승까지 했을까 싶어요. 전공을 했다면 그냥 테너가 되지 않았을까요. 지금 상황이 만족스러워요. 클래식도 비스무레하게 할 수 있고, 트로트도 불러보고, 록도 하고 더 마니아틱한 것도 도전해볼 수 있고, 음악적으로 펼칠 수 있는 스펙트럼이 넓으니까요. 지금은 어머니도 응원을 많이 해주시고, 노래 지적까지 해주시는데 좋은 데이터가 되요. 가장 디테일하게 듣는 측근이라 피드백이 정확하거든요.”
어머니와의 약속인 장학금을 받기 위해 전공인 화학을 ‘열공’한 덕에 회사에서도 촉망받는 연구원이었다. LCD 편광필름을 얇게 만드는 기술을 연구했는데, 나름 비밀리에 국책 과제도 진행했었다고. 회사에서 없던 규정을 만들어 1년이나 휴직을 허락하며 그가 돌아오길 기다려줬던 이유다.
“마지막으로 공장장님께 인사드리러 가니까 나중에라도 잘 안되면 언제든 돌아오라고 하셨죠. 그렇게 감동적으로 퇴사를 했는데, 코로나가 올 줄 몰랐네요. 작년엔 다시 마이너스 통장을 뚫어야 했죠.(웃음) 지금 돌아보면 오히려 기회가 됐어요. 파트너 용우와 함께 음악적 고민을 나누면서 이것저것 만들어보는 과정과 시간이 있어서 이번 앨범이 나올 수 있었죠. 처음엔 정말 형편없었거든요. 포레스텔라가 계속 바쁜 상황이었다면 물리적 시간이 부족해서 이렇게 만들지 못했을 거예요.”
선 고운 외모에 여성의 소프라노 음역대로 극도의 섬세한 발성과 창법을 구사하지만, 그는 평소엔 매력적인 저음을 가진 상남자였다. ‘부산싸나이’라는 본캐 대신 샤방샤방 이미지로 비치는 카메라 속 자신의 모습에 “한동안 자괴감이 엄청났다”고 털어놓았다. 그런 마음을 반영한 노래가 자작곡 ‘페르소나’다. “사회적인 내 모습과 본래 내 모습 사이의 괴리감을 표현한 곡이에요. 한동안 가치관의 혼란을 느낄 정도였거든요. 노래할 때는 아련함을 표현하기 위해 고운 라인이 본능적으로 나오지만, 일상에서는 그런 걸 엄청 싫어하니까요. 사투리가 아닌 어정쩡한 말투 쓰기도 불편하고 스스로 견디기 힘든 부분이 많아서, 초반엔 공연 때 멘트도 잘 안 했어요. 대중들에겐 카운터테너 강형호로 비치겠지만, 제 ‘본캐’는 록커거든요.”
또 하나의 자작곡 ‘프레이어’에도 그의 남자다움이 물씬하다. 전쟁영화에서 영감을 받은 곡인데, 위기가 닥치면 요행만 바랄 게 아니라 밀고 전진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았다. “전쟁영화를 진짜 좋아해요. 주인공들이 위기에도 그 틈새를 헤쳐 나가잖아요. 그런 걸 모티브 삼았죠. 저도 코로나 겪고 나락으로 떨어질 위기에서 직업의식이 생기더군요. 초기의 괴리감에도 이제 적응해서 콘서트 때 편하게 멘트도 하고 자연스러워졌어요. 1집 때는 카운터테너 딱지를 어떻게든 떼고 싶었는데, 지금은 그게 든든한 동앗줄이란 걸 알아요. 그런 감수성 표현을 할 수 있으니 음악적으로는 엄청난 행운아죠. 그 부분은 팀에서 하면 되고, 내 본색은 ‘피타’로 드러낼 수 있으니 이제 고민할 필요가 없네요.”
사실 그는 모창의 달인이다. ‘히든싱어’ 고유진 편에 출연해 주인공을 내내 위협하며 준우승을 차지했고, 김경호 모창은 더 똑같다. 노래 선생님이 없었기에 록커들을 스승 삼아 그들의 창법을 따라 하며 노래 연습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자기만의 길을 걷게 된 그에게 “롤모델은 없다”.
“제가 머리 기르고 헤비메탈 할 건 아니니까요. 저만의 청사진을 잘 그려야죠. 누군가를 카피할 게 아니라 블루오션을 찾아 저의 마니아틱한 감성을 좋아해 줄 분들에게 다가가고 싶어요. 큰 그림으로는 자우림의 김윤아씨가 롤모델이겠네요. 자우림과 김윤아 개인의 음악은 표현하는 톤이나 감수성이 전혀 다르거든요. 저도 그렇게 두 색깔을 다 갖고 싶습니다.”